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합중국 해병레이더연대 (문단 편집) ==== 창설과정 ==== 시간이 흘러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자 당시 국방부 장관인 [[도널드 럼즈펠드|도널드 H. 럼즈펠드]]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며 당시 해병대 사령관인 제임스 L. 존스 해병대장에게 해병대도 SOCOM측에 협조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당시 미 해병대 사령부 본부의 MEU(SOC)부대 관리 총 책임자 자리에 있던 가일즈 카이저 해병중령[* 해병 보병부대와 해병 항공함포연락중대장(ANGLICO), 그리고 제2포스리콘 중대장 역임. 유럽특수작전사령부(SOCEur) 스텝 파견근무.]은 직속상관인 에밀 S. 버다드 해병중장의 지시를 받고 플로리다주 템파의 통합특수전사령부(SOCOM) 본부로 가서 관계회복을 도모하게 된다. 당시 9.11 사건 이후에도 SOCOM과 해병대 사령부측은 서로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고 교류에 대해서도 양측이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저 중령은 끈질긴 노력 끝에[* 카이저 중령 본인이 과거 유럽특수전사령부(SOCEur) 파견경험과 제2포스리콘 시절 육군 특수전 대원들과의 개인적인 교류를 통해 특수전 분야에 있어서 SOCOM 소속 부대들의 전문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해병대 수뇌부 측의 반대에 대해 '열정만 가지고 그들(SOCOM)과 같은 능력을 가지는게 아니다'는 마인드로 설득에 임했다고] 2001년 11월, 당시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L. 존스 해병대장과 통합특수전사령부(SOCOM) 사령관인 찰스 R. 홀랜드 공군대장의 합의를 이끌어 낸다.[* 그외에도 카이저 중령이 유럽특수전사령부 파견시절 보좌했던 엘던 A. 바그웰 육군 소장이 2001년 11월 당시 SOCOM에 근무중이었던 점도 도움이 컸다.] 사실 이전에 9.11 사건 바로 직후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L. 존스 해병대장은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고 통합특수전(SOCOM)사령관 찰스 R. 홀랜드 공군대장에게 포스리콘 병력 일부를 SOCOM측에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이미 밝힌 상태였다. 해군특수전사령부(NSWC) 사령관은 같은 해상 관련 부대이니 제휴를 한번 고려해보겠다고 하였고, 육군특수전사령부(USASOC)측도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하였는데, 당시 해병대 수뇌부 측에선 육군특수전사령부(USASOC)와의 협력을 좋은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가일즈 카이저 해병중령은 9.11 사건으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GWOT)[* Global War On Terror]에서는 앞으로 특수작전의 수요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고, 단순히 포스리콘을 파견하는 방식보다는 SOCOM내에 그 이상의 새로운 해병 특수부대의 창설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새로 창설될 특수부대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직접타격(Direct Action), 특수정찰(Special Reconnaissance), FID(Foreign Internal Defence)[* 해외내부방어 임무.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외나라(주로 분쟁국가)에 주둔하며 대민지원, 군사훈련 제공, 정부군과의 협력을 통해 각종 전투에도 참가, 등등], 합동지원(Coalition Support)[* 타군 특수부대 또는 정규군과의 합동작전 수행. 다른나라의 연합군들과도 함께.] 4가지를 기본으로 중점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카이저 해병중령은 조셉 G. 새틀렌 해병원사[* 1980년에 해병대 보병으로 시작하여 1987년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사단 수색대대, 제2포스리콘 중대 등에서 복무.]와 트로이 G. 미첼 해병상사[* 제2포스리콘 출신.]와 함께 86명 규모의 새로운 해병 특수부대 창설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다. 2002년 1월, 위 세 사람은 초안을 들고 SOCOM 본부에서 브리핑을 실시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해병대와의 협력에 관하여 SOCOM 내부의 거부감과 불신은 여전히 존재했는데[* 카이저 해병중령이 '해병대에도 이런저런 특수 작전 능력을 가진 부대(포스리컨)가 있다.'라고 브리핑을 하면 SOCOM장교들은 '아니. 어쨌든 너희는 특수작전부대가 아니야.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없어.'하는 식으로] 특히 해군특수전사령부(NSW) [[네이비 씰]] 측에서 반대하였다. SEAL은 이미 해상특수전 분야에서 자신들만의 전통과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놓은 상태였고, 해병특수부대의 창설은 아무래도 작전분야가 겹칠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분야가 겹치는 부대가 또 생겨나면 SEAL 측의 지원 예산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해병특수전사령부 창설 대신에 통합사령부(SOCOM)내에 (연락장교가 아니라) 작전, 지휘 보직에도 해병대 장교들을 임명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군특수전사령부(NSWC)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육군특수전사령부(USASOC)와 공군특수전사령부(ARSOC)의 지지 덕분에 카이저 중령은 목표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간에 해병대도 해군과의 연계성이 컸었기에 카이저 해병중령은 결국 해군특수전사령부(NSWC)와의 협력을 택하기로 한다.[* 사실 카이저 중령 본인은 해군특수전사령부측이 자신들의 계획을 도와주기는커녕 끝내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2002년 3월에, 카이저 해병중령과 일행들은 의견 조율을 위해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에 위치한 해군특수전사령부(NSWC) 본부로 갔다. '''해병대 일행들이 도착하자마자 SEAL측에선 기초특수전교육과정인 BUD/S의 영상물을 먼저 보여줬는데, 이것은 "너희들은 특수부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 같았다고 카이저 중령은 회고'''한다. 해군측에서는 여전히 해병대 특수작전부대가 SOCOM에 대한 지원병력과 스텝 유닛으로 제한되어야한다고 생각했고, 중령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카이저 중령과 동료들이 해병대 사령부와 SOCOM, 국방부를 넘나들며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2년 가을이 되어서야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캠프 팬들턴 해병대 기지에서 해병특수전 병력의 초기 대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새롭게 생길 특수전 병력의 총 지휘관으로는 로버트 J. 코츠 해병중령[* 제1포스리콘 중대장, 제1해병원정군(1st MEF) 휘하 특수작전훈련단(SOTG) 단장 역임.]이 선택되었다. 또 카이저 중령은 새로 생길 특수전부대의 명칭을 2차대전때 잠시 생겼다가 전후에 해체된 해병대의 경보병부대 '[[미합중국 해병레이더스|해병 레이더스(2차대전)]]'[*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2차대전 당시의 '[[미합중국 해병레이더스|해병 레이더스(2차대전)]]'는 [[코만도(특수부대)|영국군 코만도]]나 2차대전 당시에 존재했던 [[제75레인저연대|미 육군 레인저 대대]]와 흡사한 경보병 강습부대였다. 물론 현재 다시 창설된 해병특수작전사령부(MARSOC)의 해병레이더연대는 과거 2차대전 때의 해병레이더스같은 경보병 강습부대 타입이 전혀 아니고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미 육군 그린베레]]와 더 비슷한 부대라고 할 수 있다.]의 부대명칭과 마크를 계승하기로 하였다. 2차대전 레이더스 전우회측은 이를 허락하였다. 2002년 12월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L. 존스 해병대장은 다가올 해병대 SOCOM 작전부대의 설립을 공식화하였다. 전체적인 부대편성표는 대략 아래와 같이 계획하고 인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 MCSOCOM DET ONE[* Marine Corps SOCOM DETachment ONE] [[파일:detoneemblem.png|width=300]] * DET ONE 본부 및 정보병력 (29명) * 라디오 정찰팀 (9명) * 시그널 서포트 (3명) * 휴민트 (6명) * 정보 총괄 (12명) * 정찰소대 병력 (30명) - [[미합중국 해병수색대|제1,2 포스리콘]] 출신 대원들로 사실상 이들이 실제 작전대원 이었다. * 화력지원 (7명) * 그외 4명의 [[미합중국 해병수색대|해군 특수상륙수색 의무병(SARC: Navy Special Amphibious Reconnaissance Corpsman)]]과 기타 포지션 인원들까지 총 합 86명. DET ONE의 수석 현장 지휘관으로는 크레이그 S. 코제니스키 해병소령[* 해병대 보병장교, 산악전 훈련센터 교관, 98~2000년 제1포스리콘 작전장교, 영국 해병대 교환 장교]이, 그리고 참모는 매튜 H. 크레스 해병대위[* 해병대 보병장교, 제1해병원정군(1st MEF) 휘하 특수작전훈련단(SOTG) 교관, 제1포스리콘 보급장교]가 맡았다. 훈련 담당에는 제임스 R. 루탄 해병상사[* 1983년 해병대 보병입대. 1988년부터는 수색대 관련부대에서만 복무], 작전 부분에는 토마스 P. 무라토리 해병상사[* 해병 1사단 수색대대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막 돌아온 상태였다.], 통신을 담당한 이는 제임스 E. 와그너 해병중사[* 20여년간의 해병대 생활중 9년간 제1포스리콘에서 복무. 역시나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막 돌아온 상태였다.] 였다. DET ONE의 핵심 작전대원들인 정찰소대 병력은 30명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정찰소대장은 에릭 N. 톰슨 해병대위[* 13th MEU(SOC), 제1포스리콘, 아프간 파병을 마치고 막 돌아온 상태였다.]가 맡았다. 이 30명 규모의 정찰소대는 또 4개의 정찰팀으로 나뉘었는데, 1팀장은 테리 M. 와이릭 해병중사[* 해병 1,2사단 수색대대, 네덜란드 해병대 교환복무, 제2 포스리콘 중대가 CIF특임대이던 시절 복무.], 2팀장은 조셉 L. 모리슨 해병중사[* 제1해병사단 수색대대, 제1해병원정군(1st MEF) 휘하 특수작전훈련단(SOTG) 사격교관, 제1포스리콘, 제2포스리콘.], 3팀장은 찰스 H. 파딜라 해병중사[* 보병으로 해병1사단 1연대 2대대, 해병3사단 9연대 3대대, 이후에는 해병1사단 수색대대, 제5포스리콘, 해병대 산악전 교관, 영국 해병대 코만도에서 교환복무 중 모집됨]가 맡았고 마지막으로 4팀장은 존 A. 데일리 해병중사[* 제1포스리콘, 제1해병원정군(1st MEF) 휘하 MEU(SOC)로 아프간 파병, 특수작전훈련단(SOTG) 교관 근무 중 모집.]가 맡았다. 정찰소대 수석 상사로는 키스 E. 오크스 해병상사[* 제1해병원정군(1st MEF) 휘하 특수작전훈련단(SOTG) 사격교관, 제1포스리콘 근무, 육군 레인저스쿨 수료자라면 소속 군을 막론하고 참가할 수 있는 베스트 레인저 선발대회(Best Ranger Competition) 우승,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년동안 조지아주 포트베닝에 위치한 육군 레인저 훈련 여단에 파견 교환 근무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가 맡았다. 그외에도 매튜 S. 프란카 미 해군 특수상륙수색 의무 하사[* 미 육군 특수전 의무병 과정 이수. 플로리다 세인츠 피츠버그 병원 응급실에서 로테이션 근무. 해병 보병대대와 수색대대, MEU로 이라크 2회 파병. 제1포스리콘으로 이라크 파병 후 돌아온 상태.]를 비롯한 해군 의무병 4명이 각자 1개 정찰팀에 한명씩 배치되었다. 정찰소대 병력 30명의 평균 연령은 30세로, 모두가 해병 보병부대로 시작하여 이후 [[미합중국 해병수색대|디비젼리콘(사단 수색대)과 포스리콘]]에서 수년간 복무한 자들로, 대부분이 해병대 산악전교육센터과 원정군(MEF) 휘하 특수작전훈련단(SOTG)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또 절반 이상이 정찰 저격수 교육 이수자였다. 정찰팀장을 비롯한 지휘관 급들은 모두 [[육군]] [[레인저 스쿨]] 위탁교육을 수료한 이들이었다. 90년대 걸프전, 소말리아, 보스니아, 코소보 그리고 2001년 9.11 사건 이후 최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파병을 막 마치고 돌아온 자들도 있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DET ONE의 병력 대부분이 포스리콘 출신은 아니었다. 전체 86명의 병력중에서 포스리콘 출신은 정찰소대 소속 작전대원 24명 뿐이었다. 하지만 정찰소대 병력들 외에 정보, 화력지원, 통신, 라디오 정찰[* Radio Reconnaissance. 라디오 정찰대. MEF(해병원정군) 소속 라디오 대대(Radio Battalion) 소속이며 통신신호와 정보를 담당하는 대원들이다. 이들은 DET ONE으로 전입 가기 전에 기본수색입문과정(Basic Reconnaissance Primer Course: BRPC)을 이수했다. 이 기본수색입문과정은 기본 수색 과정(BRC) 입교 전에 받는 체력강화 및 부적격 테스트 과정이다.], 군수보급, 행정 등 지원 인력들도 역시나 수년간 해병대 보병이나 기타 보직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 각 분야의 베테랑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부족한 예산과 낙후된 해병대 장비에도 불구하고 직접 뛰어다니며 발품을 팔아 DET ONE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등 부대 창설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파일:detone42.jpg]] 미국 본토에서 훈련중인 DET ONE 이렇게 모양새를 갖추고 나서 2003년 6월 20일이 되어서야 드디어 MCSOCOM DET ONE이 캘리포니아주 캠프 펜들턴 Del mar에서 창설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해병대 사령관과 수뇌부를 비롯해 SOCOM 지휘부, 해군특수전사령관, 그리고 대원들의 가족들도 참석하였다. 이후 DET ONE은 캠프 펜들턴 Del mar를 본부로 삼고 여러 지역에서 SOCOM의 추세에 따라 현대적인 특수전 훈련을 자체적으로 실시했다. 도중에 방출되는 대원과 새로 전입 온 대원도 있었고, 차량 훈련에서는 사고로 대원 한명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어쨋거나 상당한 수준의 자체적인 역량을 쌓고, 이후 SEAL 1팀[* 해군 제1특전단 SEAL 1팀.] 과의 몇번의 (순탄치는 않았던) 연합훈련과 자체평가훈련을 마치고 2004년 4월, 드디어 이라크로 첫 파병을 가게 된다.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CQB의 경우 전통적인 보병식의 사격방식에서 벗어나서 현대적이고 전술적인 사격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전직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델타 포스]] 출신의 사격강사 [[래리 빅커스]]를 영입해서 교육받았다. DET ONE 정찰소대장이자 제1포스리콘 출신인 톰슨 해병대위는 [[래리 빅커스]] 강사가 가르쳐 준 CQB와 사격교육에 대해 '''"우리가 그때까지 해병대 포스리콘에서 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방식은 아주 획기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포스리콘 정찰팀원 중 한명이었던 알렉스 N. 콘라드 해병하사도 "사격훈련장(House)에서 우리가 '''포스리콘에서 하던 기존 방식대로 방안에 진입하면 우리가 모두 죽을 수도 있다고 [[래리 빅커스]]가 말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고 그와의 훈련이 DET ONE 훈련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